기원후 70년

로마에는 기원후 81년경에 세워진 티투스 개선문이 있습니다. 문 안쪽에는 부조가 있는데, 로마 병사의 행렬이 일곱 가지 촛대를 메고 예루살렘에서 개선해 돌아옵니다.

티투스 개선문 부조

티투스 개선문 안쪽의 부조.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일곱 가지 촛대를 메고 행진합니다. 이긴 쪽이 이 장면을 돌에 새겼고, 이천 년 뒤 그것은 진 쪽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한 장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Anthony M. 촬영, CC BY 2.0

그 촛대는 예루살렘 제2성전에서 온 것입니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깨뜨렸고 성전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당시 유대교에게 그것은 거의 심장이 도려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사는 성전에서 드려야 하고, 사제는 성전을 중심으로 섬기고, 한 해에 몇 차례의 순례도 종착지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이 없어지면 종교 생활 전체가 중심을 잃습니다.

한 종교의 중심이 무너지면 보통 어떻게 됩니까? 같은 지중해 세계의 다른 신전들을 보면 압니다. 문이 닫히고 사제가 흩어지고 몇 세대 지나면 신앙은 유적만 남습니다.

유대교는 그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이어받은 것은 랍비

랍비 문헌에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요하난 벤 자카이라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관에 넣어 성 밖으로 메고 나가게 하여 로마 장군을 찾아가 단 한 가지를 청했습니다. 해변의 작은 도시 야브네에 학당을 열 수 있게 해 달라고.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전설이 말하려는 것은, 성을 잃는 것은 괜찮아도 책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뒤 유대 사회의 핵심이 되어 간 것은 랍비, 곧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향이 아주 큰 일을 했습니다. 구전으로 이어지던 율법을 체계적으로 써 낸 것입니다. 200년경 『미슈나』가 편찬되었고, 이에 대한 논의와 주석은 훗날 『탈무드』로 모였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베네치아판

『바빌로니아 탈무드』 제라임 편, 베네치아 봄베르크 인쇄본, 1543–1544년. 가운데 단이 본문이고 둘레로 역대의 주석이 겹겹이 둘러 있습니다. 한 권의 책에 대대로 사람들이 말을 덧붙여 갔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이렇게 해서 종교의 중심은 하나의 건물에서 한 벌의 텍스트와 하나의 살아가는 방식으로 옮겨 갔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못하는지, 혼인과 재산은 어떻게 하는지가 모두 책에 적혀 있어 어디를 가든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성인 남자 열 명이 모이면 집단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성전도 사제도 필요 없습니다.

히브리어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이천 년 동안 그것은 유대인의 일상 구어가 아니게 되었지만 기도와 독경의 언어로 계속 남았습니다. 19세기 말 벤 예후다 같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시 일상에 쓰는 말로 되돌렸고, 1922년에는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공용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책상에 앉은 벤 예후다

예루살렘의 책상에 앉은 벤 예후다, 1912년경. 그는 현대 히브리어 대사전을 편찬했고 세상을 뜰 때까지 이어 갔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Shlomo Narinsky 촬영, 퍼블릭 도메인

유대교는 '휴대 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아낸 것입니다. 책이 있고 모이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문명의 핵은 사람을 따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 매끄럽다

여기까지 오면 많은 사람이 선뜻 멋진 결론에 닿습니다. 한 권의 책이 한 민족을 구했다.

경제사학자 마리스텔라 보티치니와 즈비 에크슈타인은 『선택받은 소수』(2012)에서 이 결론에 매우 눈에 띄는 주를 달았습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성전이 무너진 뒤 랍비들이 새로운 규칙을 밀어붙였다는 점입니다. 유대인 남자는 누구나 경전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아들을 공부시키러 보내야 한다. 절대다수가 농사를 짓고 글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던 시대에 이것은 무거운 부담이었습니다. 아이가 공부하면 집안에 일손이 하나 줄고, 학비도 들어야 합니다. 신앙이 수업료를 받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인기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추산에 따르면 기원후 70년 전후 세계에는 유대인이 약 500만 명 있었는데, 650년에는 100만 명 안팎만 남았습니다. 전쟁, 학살, 역병도 한몫했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규칙이 너무 비싸다고 느껴 하나둘 유대교를 떠났고, 적지 않은 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은 사람은 이 규칙을 받아들이고 짊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글을 알았고 훗날 도시로 나가 수공업과 장사를 하기도 더 쉬웠습니다.

뒤집어 보기

이 설명은 학계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인구 수치 자체가 추산이고 떠난 이유도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도 한 가지를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유대 문명은 이천 년 동안 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보고 있는 것은 살아남은 한 가닥의 선입니다. 이 책을 지고 앞으로 가지 못했거나 가지 않으려 한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부가 되었고, 다른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 밥상에서 아주 평범한 결정을 했습니다. 더는 공부하지 않겠다, 더는 지키지 않겠다, 살림이 급하다. 저는 그것을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휴대 가능'의 대가는 문턱입니다. 문턱은 문명을 지켜 주었고, 동시에 일부 사람들을 문밖에 가두었습니다.

중국 문화는 국가에만 의지할 수 있는가

인터넷에는 흔한 대비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텍스트로 살아남았고 유교는 국가와 땅에 의지해서 나라가 망하면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대비는 유교를 너무 좁게 그립니다. 동남아의 화인들은 수백 년 동안 회관, 종사(宗祠), 동향회, 그리고 교비(僑批, 해외의 사람이 비국(批局)을 통해 고향으로 보낸 편지와 돈)를 통해, 모국 정권의 뒷받침 없이도 말과 제사와 상호 부조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휴대 가능'입니다. 다만 싣고 다닌 것이 한 권의 율법서가 아니라 사람과 신용으로 짠 한 장의 그물이었을 뿐입니다.

차오산 교비 한 통

차오산 교비 한 통. 봉투에 "어머님 전상서(母親大人啓)"라고 쓰여 있고 홍콩달러가 동봉되어 있습니다. 한 장의 종이, 얼마간의 돈, 한마디 안부가 남양과 차오산 양쪽을 이어 줍니다. 교비 문서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싼례 촬영, CC BY-SA 4.0

중국 쪽의 그물은 그 뒤 어떻게 되었나

흥미롭게도 이 그물은 해외에서는 계속 살아 있었고 국내에서는 오히려 여러 번 끊어졌습니다.

1949년 이후 교비업은 먼저 관리 아래 놓였고, 1972년 국무원이 문서를 내어 국내의 사영 교비업을 폐지했으며(하이난 등 지방사 자료의 전언이고, 문서 원문은 찾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각지의 비국이 국가 은행에 합쳐져 사영 비국은 없어졌습니다. 1966년 '사구(四舊) 타파'의 몇 해 동안 많은 곳에서 사당이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족보가 불타고 위패가 부서졌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에 기댄 절반은 국가 스스로의 손으로 허물어졌습니다. 그물에 기댄 절반은 국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오히려 남았습니다. 오늘날 보존이 온전한 차오산식 사당이나 옛 규칙대로 치르는 조상 제사를 보고 싶으면 페낭이나 싱가포르로 가는 편이 차오저우로 가는 것보다 쉬울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물이 좋다

유대인의 이 길을 저는 존경하지만 그대로 따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 권의 율법서와 글을 읽을 줄 아는지라는 문턱은 사람들을 체로 걸렀고, 체에서 떨어진 그 수백만 명을 저는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제가 더 바라는 것은 동남아 화인의 그 그물과 유대인의 그 책을 이어 붙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글자와 몇 편의 공통 경전이 있고, 조상 제사와 청명 같은 예가 있고, 회관과 사당 같은 장소가 있어서,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으면서 어느 정권에도 맡길 필요가 없는 것. 묶는 것은 한 벌의 문화와 신앙이지 한 민족의 신분이 아닙니다. 문턱은 있어야 하지만 조금 더 낮아서, 흩어진 사람이 다시 찾아 돌아올 수 있게.


당신의 문화가 한 가지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참고 자료

  • Maristella Botticini & Zvi Eckstein, The Chosen Few: How Education Shaped Jewish History, 70–1492, Princeton UP, 2012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교비 문서"(2013)
  • 요하난 벤 자카이와 야브네: 『바빌로니아 탈무드』 기틴 56a–b의 전설, 사실성에는 논란이 있음
  • 티투스 개선문, 제2성전의 파괴, 『미슈나』의 성립, 히브리어의 부활: 통설
  • 유대 인구 약 500만(기원후 70년)에서 약 100만(기원후 650년)으로: Botticini & Eckstein의 추산, EH.Net 서평과 Slate의 소개에 따름 (🟡, 소개; 원서는 전쟁·기근이 설명하는 것은 많아야 절반이라고 함)
  • 교비업 국유화: 천춘성 「근대 화교 송금과 교비업의 경영 ― 차오산 지역 연구를 중심으로」, 『중국사회경제사연구』 2000년 제4기 (산터우의 유신장, 전성싱은 1977년 "교비 업무가 국가 은행으로 일원화될 때까지" 이어졌다); 제몐뉴스 「극 안팎, 〈할머니께 보내는 연서〉 뒤의 은신국, 화폐와 금융」 (1972년 국무원 문서가 국내 사영 교비업을 폐지; 1976년 1월부터 푸젠의 교비 업무를 은행이 인수; 1979년 샤먼의 교비업이 전부 중국은행으로 귀속); 『양청만보』 2026-05-27, 광둥성 당안관 인용: "1979년 교비 업무가 정식으로 중국은행 소관이 되었다" 🟡
  • '사구 타파': 통용되는 이차적 설명, 지역별 확인 필요
  • 그림 출처는 각 그림 설명에 적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