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0월의 나그푸르
1956년 10월 14일, 인도 중부의 도시 나그푸르에서 아주 큰 집회가 열렸고, 예순다섯 살의 노인이 사람들을 이끌고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이어진 이틀 동안 그를 따라 개종한 사람 수는 30여만 명에서 60만 명까지 말이 다양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집단 개종 가운데 하나입니다.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 개종 대회에서 연설하는 암베드카르.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앞장선 사람은 빔라오 암베드카르입니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학교에서 마대 조각을 직접 가져와 앉아야 했고 수도꼭지에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훗날 컬럼비아대학과 런던정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도 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벗어나려 한 것은 카스트였습니다. 몇 주 뒤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
카스트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가장 널리 퍼진 설명은 대략 이렇습니다.
3천여 년 전, 바깥에서 온 "아리아인" 무리가 인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수가 적고 현지인에게 동화될까 두려워 카스트와 내혼 규칙을 만들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구별을 혈통에 새겨 넣고, 다시 "업보"와 "윤회"로 억눌린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게 했다.
이 이야기는 아주 깔끔합니다. 누군가 한꺼번에 설계해 놓은 것처럼 깔끔합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야기는 어디서 왔나
이 "인종 정복설"의 현대판은 크게 보아 19세기의 산물입니다. 유럽 인종학이 가장 뜨겁던 시대였고, "아리아"라는 말은 언어학 개념(인도유럽어를 쓰는 사람)에서 인종 개념으로 미끄러졌습니다. 영국령 인도의 관리 허버트 리즐리는 인구조사를 주관하면서 코의 너비를 재는 식의 방법으로 카스트와 "인종"을 하나하나 맞춰 보려 했습니다.
오늘날 학계는 "아리아인"이라는 말을 대체로 이런 식으로 쓰지 않습니다.
유전자가 보여 주는 시간표
2013년 하버드 등의 연구자들이 『미국 인간유전학 저널』에 인도 아대륙 73개 집단의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인도 집단 대다수는 두 고대 집단이 섞인 후손이다. 이런 대규모 혼합은 약 4200년 전에서 1900년 전 사이에 일어났다. 그 뒤 인도는 집단들이 널리 섞이던 곳에서, 가까운 집단끼리도 혼인이 드문 곳으로 바뀌었다.
이는 두 가지를 말해 줍니다. 첫째, 오랫동안 인도의 여러 집단 사이에는 줄곧 혼인이 이루어졌고, 처음부터 막혀 있던 혈통의 벽은 없었다. 둘째, 엄격한 내혼은 그 뒤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자리 잡았다.
카스트는 정복의 순간에 봉인된 것이 아니라 천천히 굳었습니다.
식민지 기록의 손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굳어지는 데에는 또 하나의 손이 있었습니다.
인류학자 니콜라스 더크스는 『마음의 카스트』(2001)에서 말합니다. 영국 식민 정부는 1871년부터 전 인도 인구조사를 하며 모든 사람에게 분명한 카스트를 적게 했고, 1901년에 이르러서는 조사관이 각 카스트를 사회적 등급에 따라 줄 세우려 했다. 원래 유동적이고 곳에 따라 다르고 뜻도 가지각색이던 신분이 통일된 표에 올라 행정상 고정된 분류가 되었다고.
이 견해는 영향력이 크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수전 베일리는 『인도의 카스트, 사회, 정치』(1999)에서 카스트가 식민 이전부터 이미 인도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영국인은 발명자가 아니라 굳힌 사람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양쪽 모두 증거가 있습니다. 비교적 무난한 말은, 카스트에는 식민 이전의 깊은 뿌리가 있고 식민 통치가 그것을 더 뻣뻣하고 더 "공식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단단한 곳은 밥상
카스트는 왜 이렇게 깨기 어려울까요? 중요한 이유 하나는 그것이 법 속에만 있지 않고 살림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 사회학자 스리니바스는 1952년 "산스크리트화"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낮은 카스트 집단이 위로 올라가려 할 때 흔히 높은 카스트의 생활 방식을 배운다. 고기를 끊고, 술을 끊고, 브라만의 규칙을 지키는 식으로.
이는 카스트 체계에서 "정결"이 통용되는 화폐임을 보여 줍니다. 서열은 땅과 재산뿐 아니라 무엇을 먹는지, 누구와 한 상에서 먹는지, 누구와 혼인하는지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1950년 인도 헌법 제17조가 "불가촉"을 명문으로 폐지했어도 카스트는 그것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밥상의 규칙은 법의 손이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암베드카르는 이를 잘 알았습니다. 1936년 『카스트의 소멸』을 썼고, 20년 뒤 그는 종교라는 출구를 택했습니다.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로 개종하는 것입니다.

나그푸르의 "디크샤부미"(개종의 땅). 1956년 집회 터에 세워졌다. 해마다 10월이면 수십만 명이 각지에서 이곳으로 온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rakash Lokhande 촬영, CC BY-SA 4.0
우리에게도 "출신"이 있었다
암베드카르를 읽으면 늘 다른 일이 떠오릅니다. 우리와 훨씬 가까운 일입니다.
1950년대 초 토지 개혁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가정 출신"이 생겼습니다. 지주, 부농, 중농, 빈농, 고농, 그리고 "자본가", "직원" 등. 이 성분은 아버지를 따라 대대로 전해졌습니다. 출신이 나쁜 아이는 진학, 입대, 간부 승진, 공청단 가입 등 곳곳에서 벽에 부딪혔고, 혼담이 오갈 때면 상대 집안이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성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정결"과 "부정"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그것도 밥상과 혼사에 새겨졌고, 사람을 태어나면서부터 칸 속에 넣었습니다.
1966년 위뤄커라는 베이징 청년이 「출신론」이라는 글을 써서 출신이 사람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글은 민간에 널리 퍼졌습니다. 1970년 3월 그는 총살되었습니다. 스물일곱 살이었습니다.
1979년 1월 11일 중공 중앙은 「지주·부농 분자의 모자 벗기기와 지주·부농 자녀 성분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지주·부농 분자는 모두 "모자를 벗었고" 그 자녀는 더 이상 출신으로 대우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칸은 국가의 문서 한 장으로 열렸고, 인도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다만 그 이전 30년 동안 그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 가운데 개종을 기다릴 수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뒤집어 보기
"카스트는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결론은 속이 시원하게 들리고 우리 세대의 입맛에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 다른 단순화일 수 있습니다.
카스트의 일부 관념, 예컨대 경전의 "네 바르나"는 분명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유전자 연구가 알려 주는 것은 내혼이 자리 잡은 시기이지, 서열 관념이 태어난 시기가 아닙니다. "아주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나중에 굳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둘 다 맞을 수 있습니다. 같은 층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서재에 있는 암베드카르. 평생 모은 장서가 수만 권이었다고 한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한 제도가 얼마나 오래 존재해야 사람들이 그것을 "원래 그런 것"이라고 여기게 될까요?
참고 자료
- Priya Moorjani et al., "Genetic evidence for recent population mixture in India", AJHG 93, 2013
- Nicholas B. Dirks, Castes of Mind, Princeton UP, 2001
- Susan Bayly, Caste, Society and Politics in India, Cambridge UP, 1999
- M. N. Srinivas, Religion and Society Among the Coorgs of South India, 1952
- B. R. Ambedkar, Annihilation of Caste, 1936; 1956년 나그푸르 집단 개종
- 중공 중앙 「지주·부농 분자의 모자 벗기기와 지주·부농 자녀 성분 문제에 관한 결정」, 1979년 1월 11일(중발〔1979〕5호), 위키문헌 전문 🟢
- 가정 성분 제도, 위뤄커 「출신론」(1966)과 1970년 처형: 통설의 사실
- 이미지 출처는 각 그림 설명에 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