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창성 안의 포고문

1911년 10월, 우창 봉기로 도시를 차지한 뒤 혁명파는 후베이 군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들이 낸 포고문의 날짜는 더는 "선통 3년"이 아니라 "황제 기원 4609년"이었습니다.

후베이 군정부 앞

후베이 군정부 앞. 엇갈려 걸린 것은 "18성기"이고, 열여덟 개의 별은 관내 열여덟 성을 뜻합니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은 몇 달 전까지 청의 신군이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이 연도는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거의 십 년 동안 다툰 "기년 논쟁"이 있었습니다.

왜 황제인가

제정 시대에는 황제의 연호로 해를 셌습니다. 누구의 연호를 쓰는가는 누구의 통치를 인정하는가와 같았습니다.

1903년 학자 류스페이(劉師培)가 「황제기년론」을 썼습니다. 뜻은 직접적입니다. 청나라 황제의 연호로 해를 세면 청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다른 "우리"임을 보이려면 출발점을 바꿔 처음부터 새로 세어야 하고, 한인의 시조로 높여지는 황제에서부터 센다.

류스페이

류스페이(1884–1919). 「황제기년론」을 쓸 때 열아홉 살이었고 격렬한 반만 혁명파였습니다. 몇 해 뒤 청 조정으로 돌아섰고, 민국 초에는 위안스카이의 제위 추진에 거들었으며, 서른다섯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한 사람의 원년도 여러 번 바뀔 수 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황제 기년은 곧 혁명파의 간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즉위했는지는 원래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신문마다 사람마다 계산한 숫자가 달랐습니다. 같은 조상인데 신문에 따라 생일이 달랐던 것입니다.

황제의 초상

명청 시대 사람이 그린 황제의 초상. 황제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시대나 자기 마음속의 조상을 그렸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두 개의 원년, 두 가지 "우리"

같은 시기에 또 다른 "자기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공자 기년입니다. 캉유웨이 같은 유신파는 공자의 탄생일을 원년으로 삼자고 주장했습니다.

이 두 기년은 전혀 다른 두 갈래의 정체성의 길을 나타냅니다.

  • 황제 기년: 조상의 혈통에서 셈. 종족과 민족을 말한다.
  • 공자 기년: 성인의 교화에서 셈. 문화와 도통을 말한다.

하나는 "우리는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고, 하나는 "우리가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대만 학자 선쑹차오(沈松僑)는 1997년에 황제가 만청에 어떻게 "국족의 시조"로 빚어졌는지를 정리한 논문을 썼습니다. 제목은 루쉰의 시에서 땄습니다. "내 피를 헌원에게 바친다."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 출발점을 고르는 일은 거의 모든 집단이 해 왔습니다.

유대력은 "창조"를 원년으로 삼으며 기원전 3761년에 해당합니다. 이 연도는 옛사람이 대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세의 랍비들이 『성서』의 족보를 따라 한 세대씩 거꾸로 추산한 것으로, 주로 2세기 학자 요세 벤 할라프타가 썼다고 전해지는 『세데르 올람 랍바』에 따릅니다.

서력은 예수의 탄생을 원년으로 삼는데, 6세기 디오니시우스라는 수도사가 계산했습니다. 오늘날 대다수 학자는 그의 계산이 예수가 실제로 태어난 해와 몇 해 어긋난다고 봅니다.

이슬람력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622년을 원년으로 삼는데, 이것은 그의 사후 제2대 칼리프 우마르 때 정해졌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고, 그다음에 되돌아보며 자기에게 시작을 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황제 기년은 짧은 기간만 쓰였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태양력으로 바꾼다고 선언하며 그해를 "중화민국 원년"으로 삼았습니다. 후베이 군정부의 포고문부터 세면 황제 기년이 공식 기년이었던 기간은 두 달 남짓입니다.

혁명이 성공한 뒤 새 나라가 고른 것은 혈통에서 센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고, 게다가 세계에서 통용되는 달력에 이어 붙인 것이었습니다.

그 뒤의 원년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9년 이후 해협 양쪽의 원년도 갈라졌습니다. 대륙은 서력으로 바꾸어 민국 연호를 쓰지 않게 되었고, 대만은 줄곧 민국 기년을 써서 오늘날까지 신분증과 공문서에 "민국 몇 년"이라고 적습니다.

같은 "중국"인데 두 곳이 각자의 해를 셉니다.

뒤집어 보기

미국 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된 공동체』(1983)에서 아주 유명한 견해를 폈습니다. 민족은 근대의 산물로, 신문, 소설, 통일된 시간 감각을 통해 "상상"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구성"이라고 말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학자도 있습니다. 근대 이전에도 실재하는 종족 정체성과 공동의 기억이 있었고, 근대 민족주의는 그 낡은 재료를 가공한 것이지 허공에서 발명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황제 기년은 구성된 것"이라는 말과 "황제에 대한 동일시에는 아주 깊은 역사적 뿌리가 있다"는 말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습니다. 출발점은 골라낸 것입니다. 골라낸 그해는 그래도 실제로 있었던 해입니다. 우리가 앞사람의 계산이 부정확함을 웃지만, 우리가 오늘 고르는 "출발점"도 아마 후세 사람에게 이렇게 가늠될 것입니다.

내가 고른다면

이 두 원년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공자 쪽을 고르겠습니다.

황제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혈통에서 세면 문은 언제나 "후손"에게만 열리고, 교화에서 세면 문은 들어오려는 모든 사람에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사람, 조선 사람, 일본 사람 가운데 황제를 조상으로 인정할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이들은 몇백 년 동안 『논어』를 읽었고 어느 날에는 공자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제가 찾는, 동아시아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이쪽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 집안의 "원년"을 정한다면 어느 해부터 세시겠습니까?


참고 자료

  • 류스페이 「황제기년론」, 1903
  • 선쑹차오 「내 피를 헌원에게 바친다——황제 신화와 만청의 국족 구축」, 『대만사회연구계간』 제28기, 1997
  • 『세데르 올람 랍바』
  •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1983
  • 후베이 군정부 포고문 "황제 기원 4609년", 1912년 태양력 채용, 양안의 기년: 통설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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