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사실
석가모니는 지금의 네팔 남부에서 태어나 인도의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평생 주로 갠지스강 유역에서 법을 설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은 불교를 힘껏 후원하며 사방에 사람을 보내 법을 전했습니다. 그 뒤 천 년 남짓 인도에는 날란다, 비크라마실라 같은 큰 불교 학문소가 생겼고, 현장과 의정도 날란다에서 공부했습니다.

일본 화가가 그린 현장 초상. 그는 날란다에서 5년쯤 머물렀고, 장안으로 돌아올 때 600여 부의 경전을 가져왔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면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를 거의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도의 불교도는 상당수가 1956년 암베드카르를 따라 개종한 신불교도와 그 후손입니다.
한 종교가 어떻게 자기 고향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요?
가장 흔한 답
가장 자주 듣는 설명은 이슬람 군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사실의 바탕이 있습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튀르크계 무슬림 장군 바크티야르 할지가 군대를 이끌고 비하르와 벵골에 쳐들어왔고, 날란다와 비크라마실라 같은 불교 중심지가 약탈당했습니다. 전통적인 설명은 날란다의 파괴를 1193년 무렵으로 잡지만, 1200년 무렵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그 뒤에도 날란다가 한동안 근근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비하르주의 날란다 유적. 오늘날 보이는 것은 벽돌로 쌓은 승원과 탑의 기단이며, 한때 이곳에는 천 명이 넘는 승려와 학생이 살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Sumitsurai 촬영, CC BY-SA 4.0
인터넷에서는 이것이 흔히 "일신교가 다신교를 쓰러뜨린" 예로 거론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 불교가 인도에서 아직 생기 있게 도시와 농촌에 퍼져 있었다면 몇 차례 약탈로 통째로 사라질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이 보는 더 긴 이야기
인도 학자 K. T. S. 사라오는 『인도 불교의 쇠퇴: 새로운 시각』(2012)에서, 미국 고고학자 라스 포겔린은 『인도 불교의 고고학적 역사』(2015)에서 모두 더 길고 더 구불구불한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줄기입니다.
첫째, 왕실이 부양하지 않게 되었다. 불교의 큰 사원과 학문소는 왕실과 부유한 상인의 후원에 크게 기댔습니다. 굽타 왕조 이후 점점 더 많은 왕조가 힌두교 신전과 브라만을 후원하는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후원이 끊기면 후원으로 살던 승단은 버틸 수 없습니다.
둘째, 터전이 바뀌었다. 초기 불교는 도시, 상업, 교역로와 밀접했습니다. 뒤에 인도 경제는 갈수록 토지와 농촌에 의존하게 되었고, 왕은 브라만과 신전에 땅을 내려 주었으며, 지방 질서는 점점 지주와 브라만이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마을과 땅을 바탕으로 한 이 질서 안에서 불교 사원은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났습니다.
셋째, 힌두교 자신이 변했다. 이 시기 힌두교는 깊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특히 "박티"(신애) 운동입니다. 비슈누와 시바 같은 신에 대한 개인적 헌신을 말하고, 문턱이 낮고 정이 짙어서 민간에서 호소력이 아주 컸습니다. 일반 신자를 두고 다툴 때 불교의 사원 중심 방식은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갈수록 구별이 어려워졌다. 후기 불교에서는 밀교의 비중이 커지면서 의례와 신격이 힌두교의 시바파, 샥티파와 점점 닮아 갔습니다. 힌두교의 푸라나 문헌은 심지어 붓다를 비슈누의 화신 가운데 하나로 흡수했습니다. 둘이 점점 닮을수록 독립된 종교로서의 불교의 경계도 흐려졌습니다.

비슈누와 그의 열 화신. 붓다도 그중 하나이다. 경쟁 상대를 자기 신전에 모셔 들이는 편이 쓰러뜨리는 것보다 더 철저할 때가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다섯째, 마지막 일격. 그런 바탕 위에서 이슬람 군대가 큰 사원을 약탈했을 때 맞은 것은 이미 몇몇 대형 중심지로 쪼그라든 불교였습니다. 맞은 것은 불교만도 아니어서 많은 힌두교 신전도 똑같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는 가정, 카스트, 마을에 박혀 있었고, 불교의 본체는 이미 사원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불교는 어디로 갔나
불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도를 떠났을 뿐입니다.
인도에서 쇠퇴하던 무렵 불교는 이미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중국, 한반도, 일본, 티베트에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인도 불교의 마지막 학자와 경전 상당수는 티베트로 흘러갔습니다. 한 종교가 고향에서 쇠하고 타향에서 번성하는 일은 종교사에서 드물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발상지 팔레스타인에서도 오늘날 기독교인은 소수일 뿐입니다.
같은 타격이 중국에서는 왜 불교를 죽이지 못했나
여기에 잠시 멈춰 볼 만한 대조가 있습니다.
불교는 중국에서도 몇 차례 혹독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당 무종 회창 연간의 일로, 사원을 헐고, 승려와 비구니를 환속시키고, 사찰 재산을 몰수했습니다(이 시리즈의 경교 편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불교는 중국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이유 하나는, 그 무렵 불교가 이미 중국 사람의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점입니다. 관음보살은 안채에 모셔지고, 음력 7월 15일 우란분절에는 조상을 천도하고, 장례에는 스님을 불러 독경했습니다. 사원은 헐 수 있어도 집 안의 이런 것들은 헐 수 없습니다. 바람이 지나가자 사원은 하나둘 다시 지어졌습니다.
1960~70년대 중국의 사원은 또 한 번 부서졌습니다. 회창 때보다 더 철저했고, 승려는 강제로 환속되고 비판 투쟁을 당했으며, 불상은 부서지고 경전은 불탔습니다. 훗날 개혁개방이 되자 많은 절이 다시 세워졌고 향불은 전보다 더 성했습니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아무도 대신 보존해 주지 않았지만 줄곧 집 안에 남아 있던 그 습관들 덕분입니다.
이 일이 말해 주는 것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것은 좋은 사례입니다.
- "더 강한 교리"에게 진 것이 아니다.
- 몇 가지 아주 구체적인 것에서 졌다. 누가 돈을 대어 부양하는가, 도시에 뿌리내렸는가 마을에 뿌리내렸는가, 경쟁 상대와 구별이 되는가, 보통 사람의 생로병사 속으로 들어갔는가.
- 군사적 타격은 진짜였지만, 이미 매우 약해진 골격에 가해진 것이었다.
이것이 "다신교는 일신교를 못 당한다" 같은 말을 내가 점점 경계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수백 년에 걸친 다원인의 과정을 교리끼리의 대결로 짜부라뜨리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보기
사라오와 포겔린의 견해에도 다툼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슬람 정복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쇠퇴"라는 말 자체가 후견지명이 담긴 말이어서 당시 사람들이 불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무난한 말은 아마 이럴 것입니다. 군사적 타격과 장기적인 구조 변화는 둘 다 진짜이고, 다투는 것은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느냐입니다.
당신 집에는 어떤 기관도 대신 보존해 주지 않는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참고 자료
- K. T. S. Sarao, The Decline of Buddhism in India: A Fresh Perspective, 2012
- Lars Fogelin, An Archaeological History of Indian Buddhism, Oxford UP, 2015
- 1956년 나그푸르 집단 개종
- 날란다 파괴 연대(1193년 또는 1200년경), 아소카 왕의 불교 후원, 회창의 폐불, 1966–1976년 사원 파괴와 이후 재건: 통설의 사실
- 이미지 출처는 각 그림 설명에 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