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겹쳤다
지난 글에서 저의 기울기는 유교의 종교화이고, 잠정적으로 "톈다오"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정한 뒤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1905년 조선에 이미 같은 한자 "天道教", 곧 천도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헌이 있었고, 교당이 있었고, 신문과 학교가 있었습니다. 1919년 조선의 독립선언서에는 33명이 서명했는데, 그중 15명이 천도교인이었고, 맨 처음 서명한 사람은 그 교주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신도는 아주 적어졌습니다.
이름이 겹쳤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제가 가장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할 대상입니다. 길까지 겹치는지는 보고 나서 말하겠습니다.
동학: 한마디의 대답
이야기는 1860년에 시작됩니다.
그해, 최제우라는 조선의 선비가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양반 집안 출신이었지만 출신 때문에 과거의 길을 걸을 수 없었고, 생애 대부분을 여기저기 떠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동학"이라 불렀습니다. 이 이름 자체가 하나의 대답이었습니다. 서학이 왔다, 우리에게는 동학이 있다.
그가 가르친 것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사람마다 마음속에 있다. 하늘을 모신다는 것은 내 마음속의 그 작은 것을 모시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알아들었고,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최제우(1824–1864), 동학의 창시자. 출처: Wikimedia Commons,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조정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1864년, 최제우는 처형되었습니다.
여기를 읽을 때마다 저는 그가 조금 외로워 보입니다. 과거의 길이 막힌 사람, 생애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마디 말과 목숨 하나였습니다.
같은 해 중국에서는 훙슈취안(洪秀全)이 죽고 천경(난징)이 함락되었습니다. 서양의 충격 속에서 자라난 동아시아의 두 종교, 하나는 서양의 상제를 빌려 왔고 하나는 굳이 "동학"이라 불렀는데, 같은 해에 창시자를 잃었습니다.
갑오년
동학은 죽지 않았습니다. 2대 교주 최시형이 최제우의 말을 경전으로 엮었고, 교단은 민간에 점점 더 넓게 퍼졌습니다.
1894년, 전라도 농민들이 동학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탐관오리에 반대하고, 가혹한 세금에 반대하고, 외국인에게도 반대했습니다. 조정은 막아 내지 못해 청에 군대를 청했고, 일본도 조약을 내세워 군대를 보냈습니다. 봉기는 곧 진압되었지만 두 나라 군대는 조선에 남았습니다. 몇 달 뒤 청과 일본은 남의 땅에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청일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청일전쟁의 도화선 가운데 하나는 한 종교였습니다. 중국어권의 역사 수업에서는 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아마 중국에서는 그 전쟁의 초점이 처음부터 조선에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깃발. 한자로 쓰여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Samhanin, CC0
봉기를 이끈 사람 가운데 하나가 전봉준입니다. 1895년 2월, 그는 압송되어 한성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진에서 그는 들것에 누워 사람들에게 들려 가고, 주위에는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과 눈이 있습니다. 그는 뒤에 처형되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저에게는 그가 "반란자"가 아니라 꽁꽁 얼어 버린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1895년 2월, 압송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들것에 누워 사람들에게 들려 가고, 곁에 제복 입은 군인이 서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무라카미 덴신, 퍼블릭 도메인
1898년, 최시형도 처형되었습니다.
천도교: 봉기를 교단으로
3대 교주 손병희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해, 근대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았습니다. 1905년 12월 1일, 그는 동학을 정식으로 "천도교"로 개칭했고, 이듬해 교헌을 공포하고 중앙 교단을 세우고 학교와 신문을 열었습니다. 실패한 농민 봉기를 제도와 조직을 갖추고 관과 상대할 수 있는 근대 종교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손병희(1861–1922), 천도교 3대 교주. 출처: Wikimedia Commons,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그 교리는 뒤에 세 글자로 응축되었습니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제가 제 구상의 상징으로 고른 것은 전서의 "天" 자입니다. 서 있는 사람의 머리 위에 가로획 하나. 그들은 그 한 획을 걷어 냈습니다.
1919
1919년 3월 1일, 한성의 한 음식점에서, 모인 29명의 민족 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선언서에는 33명이 서명했습니다. 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불교인 2명. 몇 사람은 미처 오지 못했습니다. 손병희가 맨 처음 서명했습니다.
3·1운동은 이어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고, 일본 식민 당국에게 잔혹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손병희는 체포되었다가 병으로 보석되었고, 1922년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천도교가 가장 빛나던 때입니다. 동아시아의 땅에서 자라나 "천도"를 이름으로 내건 종교가 한 민족의 맨 앞에 섰습니다.
다른 한쪽 끝
그러나 같은 교단에서 또 다른 무리도 나왔습니다.
1904년, 동학의 한 조직이 "일진회"에 합류했습니다. 1906년, 손병희는 그 우두머리 이용구를 출교했습니다. 1909년, 일진회는 앞장서서 일본에 조선 병합을 청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한 교단의 한쪽 끝에서는 독립선언서의 첫 서명이, 다른 쪽 끝에서는 병합을 청한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배신자"와 "영웅"의 이야기로 풀고 싶지 않습니다. 제 마음에 더 걸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종교가 한번 정치와 묶이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같은 "천도"로 식민자에 맞설 수도 있고, 식민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뒤
1945년, 한반도는 해방되었고, 그리고 분단되었습니다.
북쪽에서 천도교는 이름뿐인 정당으로 남았습니다. 남쪽에서는 신도가 아주 적어 오천만 인구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왜 큰 종교로 살아남지 못했을까요? 연구자들은 여러 설명을 내놓았지만, 저는 제 추측만 말하겠습니다.
첫째, 민족의 운명과 너무 단단히 묶여 있었다. 민족이 위태로울 때 그것은 불씨였습니다. 민족이 구원받은 뒤에는, 자신이 또 무엇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두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에만 답한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없어집니다.
둘째, 도시화의 시기에 자리를 남에게 먼저 내주었다. 한국은 몇십 년 만에 농촌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 바뀌었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했습니다.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한 것은 교회였습니다. 오늘 서울의 밤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은 십자가입니다.
셋째, "인내천"은 현대인이 이미 믿고 있는 것과 너무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존엄하다. 사회 전체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를 핵심으로 삼는 종교는 자기만의 대체 불가능한 무엇을 보여 주기 어렵습니다. 불교의 명상이 세속 사회에 넘어간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두 번째 추측에 대해, 나중에 다시 찾아보며 "교회가 차지했다"는 것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늦게 오지 않았습니다. 1784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조선인이 한성에 첫 기도처를 열었습니다. 뒤에 조정이 금지했고, 1801년, 1839년, 1866년에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1866년에 대해서는 옛 설에 팔천 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백과사전은 이를 전해 들은 말이 부풀려진 숫자로 보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약 1,400명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신부 아홉 명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개신교는 1883년 이후에야 들어왔고, "자급·자치하는 현지 교회"라는 방식을 택했으며, 교회가 학교와 병원도 함께 세웠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이 있었고, 1919년 3·1운동의 서명자 가운데에도 기독교인이 16명 있었습니다. 뒤의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항일 민족주의, 근대화와 교육, 한글 문해력이 서민에게 퍼진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생각이 유교의 위계를 흔들었다고.
2015년 인구총조사에서 개신교는 19.7%, 불교 15.5%, 천주교 7.9%, 무종교가 56.1%였습니다. (2024년에 31%라는 다른 조사도 있지만, 기준이 달라 나란히 놓지 않겠습니다.)
여기에는 숫자보다 더 아픈 세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신자들에게 조상 제사를 그만두고 제사상에 오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중에야 "추도 예배"가 생겨, 기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추모이지 제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귀》에서 다루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먼저 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을을 떠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집"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집은 옛것의 일부를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하는 톈다오와 다르다
이름은 같아도 길은 다릅니다. 아무도 헷갈리지 않도록 차이를 여기 적어 둡니다.
| 한국의 천도교 | 제가 말하는 톈다오 | |
|---|---|---|
| 어디서 왔나 | 동학: 19세기 조선의 토착 신종교. 유·불·도와 민간 신앙을 버무렸고, "서학"에 맞서 생겨났다 | 유교의 종교화: 사서, 조상 제사, 천명에서 자라난다 |
| 하늘은 어디에 |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 | "一과 大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머리 위에 아직 하늘이 있다. 하늘의 운행은 굳건하고 항상되며, 사람에게 경외와 자율을 준다 |
| 누구를 위해 | 조선 민족과 그 독립 |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 전체, 곧 제가 말하는 동아시아 사람들 |
| 오늘 | 한국에서 신도가 아주 적음 | 아직 구상일 뿐 |
이 시리즈에서는 앞으로 한반도의 그것을 가리킬 때 늘 "천도교"라고 부르겠습니다.
나에게 주는 경고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제 구상에 대한 경고가 세 가지 늘었습니다.
- 종교가 위기보다 오래 살려면, 위기의 질문에만 답해서는 안 된다.
- 정치에 가까울수록 정치에 끌려가기 쉽다. 어느 방향인지는 종교가 정할 수 없다.
- 세속 사회가 가져갈 수 없는 무언가를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 쓰고 나서 한 가지를 더 생각했습니다. 그 "세속 사회가 가져갈 수 없는 것"으로 지금 떠오르는 것은 일상입니다. 종교가 큰일에만 쓸모 있고, 민족이 위태로울 때나 무언가를 골라야 할 때에만 떠올려진다면, 나라가 안정되면 가져가 버려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매일 속에 자리가 있다면 어떨까요. 청명에 성묘하고, 설에 차례를 지내고, 밥 먹기 전에 잠깐 하늘을 생각하는 것. 이런 것을 "가져가는" 현대 사회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장이 아니라 나날이기 때문입니다. 천도교의 가장 큰 어려움은 그 자리가 "주장"에 있었지 나날 속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거꾸로여야 합니다. 먼저 나날이 있고, 그다음에 주장이 있는 것.
한국의 벗들에게.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은 손병희였고, 서른세 개의 이름 가운데 열다섯 명이 여러분 천도교의 사람이었습니다. 서명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제우는 과거를 볼 수도 없었고 마흔에 처형되었습니다. 전봉준은 담가에 누운 채 눈에 둘러싸여 서울로 실려 왔습니다. 손병희는 보석으로 풀려난 뒤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중국어로 쓰는 사람이고 이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제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한 사람씩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천도교에 오늘 신도가 많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민족의 가장 추운 세월에 가장 앞에 서 있던 것은 그 교단이었습니다. 저는 제 구상에 '천도(天道)'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름이 겹쳤습니다. 그 이름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배우러 온 것입니다.
민족이 위태로울 때에만 쓸모 있는 종교도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참고 자료
- 함께 읽기: 《의귀》 E07 〈공맹을 불태우려 한 정권〉, E02 〈"상제" 두 글자는 누가 골랐나〉(같은 시대 태평천국의 응답); 이 시리즈 D05 〈"하늘"이란 무엇인가〉("인내천"과 "一과 大로 이루어진다")
- Carl F. Young, Eastern Learning and the Heavenly Way: The Tonghak and Ch'ŏndogyo Movements and the Twilight of Korean Independenc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4
- 천도교 연표: 1860 동학, 1864 최제우 처형, 1894 동학농민봉기, 1898 최시형 처형, 1904 일진회, 1905-12-01 천도교로 개칭, 1906 이용구 출교, 1909 일진회 병합 청원, 1919-03-01 독립선언(천도교 15 / 기독교 16 / 불교 2), 1922 손병희 별세; 2005년 약 4.5만, 2015년 약 6.5만 명
- Pew Research Center, "Why is Buddhism shrinking worldwide?", 2026-03-11("세속 사회에 넘어감"의 대조)
- 한국 기독교화의 경과와 숫자: 작가의 조사 노트(영어 위키백과 등 2차 자료)
-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수("팔천"은 과장, 약 1,400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인박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139 🟡
- 2015년 인구총조사 종교 인구(개신교 968만·19.7%, 불교 15.5%, 천주교 7.9%, 무종교 56.1%): Korea Times 2017-01-10, 통계청 인용 https://www.koreatimes.co.kr/amp/lifestyle/others/20170110/more-koreans-now-non-believers-census-shows 🟡
- 그림 출처는 각 설명에 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