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하나

1945년 12월 15일, 연합군 총사령부는 지령 하나를 내렸습니다. 번호는 SCAPIN 448. 제목이 깁니다. "국가신도, 신사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증, 지원, 보전, 감독 및 홍포의 폐지에 관한 건".

초안을 쓴 사람은 미 해군 예비역 장교 윌리엄 번스였습니다. 연합국이 보기에 그들이 말하는 "국가신도"란, 비틀려서 군국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의 선전 도구가 된 신도였습니다.

이 지령 이후 신사는 더 이상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학교에서는 신도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국가와 신사 사이가 잘려 나간 것입니다.

그 전 몇십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먼저 신사와 절을 떼어 놓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의 신과 부처는 오랫동안 섞여 있었습니다. 신사에 부처가 있고 절에 신이 있었으며, 승려와 신관이 같은 사람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1868년, 새 정부는 "신불분리"를 명해 둘을 억지로 떼어 놓았습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어서 절을 부수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그 절에 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 신관과는 원래 함께 경을 읽고 함께 명절을 지냈는데, 명령 하나가 내려와 너희는 두 집이니 갈라서라고 합니다. 많은 지방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어느 쪽에 가서 향을 피워야 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새 국가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천황 주위로 모을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고른 것이 신도였습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일본은 근대 국가가 되고 싶었고, 근대 국가는 신교의 자유를 약속해야 했습니다.

1889년에 반포된 메이지 헌법은 제28조에서 신교의 자유를 규정했지만 제한을 붙였습니다. 안녕과 질서를 해치지 않고, 신민의 의무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모든 사람에게 신사를 참배하게 하면서 신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

1882년, 내무성은 신관이 교의를 설교하는 "교도직"을 겸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신사는 제도상으로 따로 떼어졌습니다. 신사가 하는 것은 국가의 제사이고 "국민의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은 뒤에 이 구도를 "신사비종교론"이라 불렀습니다.

1890년, 교육칙어가 반포되었습니다. 칙어와 천황의 사진이 학교 의식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교육칙어

1890년의 교육칙어. 뒤에 천황의 사진과 함께 학교 의식의 중심이 되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이노우에 고와시 외, 퍼블릭 도메인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

1891년 1월 9일, 도쿄 제일고등중학교.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촉탁 교사 우치무라 간조가 칙어에 깊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일이 신문에 실려 전국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치무라는 사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는 일련의 글을 써서, 기독교는 천황에 대한 일본 신민의 의무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

우치무라 간조(1861–1930). 출처: Wikimedia Commons, 마스모토 시게오·후지사와 오토키치 촬영, 퍼블릭 도메인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정의가 인사 한 번을 시험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너는 일본인인가.

반란을 꾀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깊은 인사를 하지 않았을 뿐인 사람이 직장을 잃고, 온 나라 사람들의 입에서 "불경"이 되었습니다. 여기를 읽으면 저는 그를 대신해 지칩니다.

전쟁의 시대

1930년대에 들어 "국체"가 점점 더 강조되었고, 신사 참배는 점점 더 강제처럼 되었습니다.

1943년, 뒤에 창가학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가 신찰, 곧 신사에서 나누어 주는 부적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도다 조세이 등 교단의 지도자들과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1944년 11월 18일, 일흔이 넘은 마키구치는 도쿄 스가모 구치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1871–1944). 출처: Wikimedia Commons, 창가학회, 퍼블릭 도메인

그의 동기에 대해서는 후대에 논쟁이 있습니다. 교단은 이를 군국 체제에 대한 항의로 보지만, 그가 주로 자신의 니치렌 신앙을 지킨 것이지 정치적 이견자는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어느 한쪽 편을 들어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갈라진 뒤

1945년 12월 15일 이후, 1946년 1월 1일 천황은 "인간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47년의 새 헌법은 제20조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했습니다.

신사는 국가의 품에서 나와 민간의 종교 법인이 되었습니다. 1946년, 전국의 신사가 모여 신사본청을 세웠습니다.

국가가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는 국가가 하나의 전통에 내린 정의였습니다. 이런 일은 일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제가 읽은 자료로는 이렇습니다. 1965년, 국가는 공교를 6대 종교의 하나로 인정했습니다. 1967년, 화인의 종교와 문화 활동을 제한했습니다. 1978~79년에는 내무부 통첩이 5대 종교만 인정했는데, 그 이유는 공교가 화인의 동화를 가로막고 "중국에서도 종교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회복은 2000년에야 시작되었고, 2006년 종교부 통첩이 다시 인정했습니다. 같은 것을 국가는 한때는 종교라 하고 한때는 종교가 아니라 하며, 정치의 필요에 따라 오락가락했습니다. (1965년, 1967년, 2000년의 세 법령은 원문을 읽었고, 1978년과 2006년의 두 통첩은 원문을 읽지 못해 인도네시아 학자들의 논문에 실린 소개에 따랐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현재 공식 인정되는 종교는 다섯입니다.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 유교는 그 안에 없습니다.

홍콩은 또 다릅니다. 1928년의 "화인묘우조례"는 묘(廟)·사(寺)·암(庵)·관(觀)·도원(道院) 말고도, 신을 모시고 영과 통하고 점을 치면서 대중에게서 돈을 받는 곳이면 "화인 묘우"로 봅니다. 보는 것은 무엇을 하는지, 돈을 받는지이지, 교리가 아닙니다. 조례는 위원회를 두고, 모든 화인 묘우의 수입·기금·투자·재산을 위원회가 전권으로 관리한다고 명시했습니다. 한편 정부의 2012년 답변에 따르면 민정사무국은 종교 단체의 등록을 하지 않으며 홍콩 법률도 종교 단체의 운영을 규제하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의 1978년 11월 통달과 2006년 2월의 두 서한은 학술 논문의 전언만 읽었고 원문은 읽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보기

"국가와 종교가 묶이면 반드시 탈이 난다." 이 말이 늘 맞는 것은 아닙니다.

덴마크 헌법 제4조는 지금도 복음 루터교회를 덴마크의 국교회로 하고 국가가 지원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2000년 1월 1일 국교회의 지위를 폐지했습니다. 노르웨이는 2012년 개헌으로 "국가 종교"라는 표현을 삭제했지만, 교회는 여전히 "국민의 교회"로서 국가의 지원을 받습니다. 이 나라들의 교회는 신교의 자유, 다원적 사회와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니 문제는 "국교가 있느냐"가 아니라 다른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여가 강제되는가, 떠나는 데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국가가 동원하는 것이 의례인가 전쟁인가.

한 겹 더 있습니다. 지령이 "국가신도"에 내린 것은 점령 정책상의 정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로 통일된 대상이었는지는 학계에서도 논의가 있습니다.

일본의 예는 저에게 아주 분명한 경고입니다. 저는 종교는 국가와 민족과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국가가 인정해 줄 일이 아니라고 자주 말합니다. 국가가 등록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땅, 세금, 법인격, 이런 것은 현실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종교인가", "당신의 전통은 종교에 드는가"라는 정의만은 국가에게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국가가 한번 정의를 내리면, 국가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사는 국민의 의례라고 하면 고개를 숙여야 하고, 공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면 사당을 학술 기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같은 전통이 국가의 손에서는 한때는 "그렇다", 한때는 "아니다"가 되며, 그 쓰임새에 따라 바뀝니다.

공정하게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국가가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쉽지 않습니다.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아주 가까워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일본의 문제는 국가가 신사를 백성을 동원하는 도구로 삼아 "반드시"를 요구했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더 가는 선 하나입니다. 등록은 좋다, 지원도 좋다, 그러나 요구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고, 정의하지 않는다. 이 선을 그을 수 있을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역사에서 그것을 해낸 예는 많지 않습니다.

일본의 벗들에게. 제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1891년 1월 9일 도쿄 제일고등중학교, 칙어 봉독의 날에 우치무라 간조는 그것에 깊이 절하지 않았고 이후 직장을 잃고 전국의 신문에 비난받았습니다. 오십 년 남짓 뒤 일흔 살의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신사가 나눠 주는 부적을 받기를 거부했고 1944년 11월 스가모 구치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 다 자기 나라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고 다만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 그들에 대해 읽으면 그것을 '불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나라가 모두에게 똑같은 절을 하게 할 필요는 없고, 마음속의 것을 지키는 사람도 똑같이 그 나라의 사람이라고.


국가가 어떤 전통을 "종교가 아니라 그저 풍속"이라고 선언할 때, 그것은 지키는 것일까, 거두어 들이는 것일까?


참고 자료

  • SCAPIN 448(1945-12-15) "Abolition of Governmental Sponsorship, Support, Perpetuation, Control, and Dissemination of State Shinto"; 1882년 내무성 "신관·교도직 분리"("신사비종교론")
  • Helen Hardacre, Shinto and the State, 1868–1988, Princeton UP, 1989
  • 우치무라 간조 "불경 사건"(1891-01-09); 이노우에 데쓰지로 "교육과 종교의 충돌" 논쟁
  •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1943년 신찰 거부로 체포, 1944-11-18 스가모 구치소에서 사망
  • 덴마크 헌법 제4조; 스웨덴 교회와 국가 분리 2000-01-01; 노르웨이 개헌 2012-05-21
  • 1868년 신불분리령, 1889년 메이지 헌법 제28조, 1890년 교육칙어, 1946-01-01 "인간 선언", 1946년 신사본청 설립, 1947년 헌법 제20조: 통설
  • 인도네시아·중국 대륙·홍콩의 등록과 정의: 작가의 자료 노트 〈천하에서 국가로〉 제3절(2차 자료). 원문을 확인한 것은 아래와 같고 나머지는 미확인
  • 그림 출처는 각 설명에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