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사람 하나

후한의 허신(許慎)은 《설문해자》에서 "천(天)"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천은 정수리다. 더없이 높아 위가 없으니, 一과 大로 이루어진다(天, 顚也。至高無上, 從一大).

"顚(전)"은 정수리, 머리의 꼭대기입니다. "大"는 팔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글자 모양을 거슬러 올라가면, 갑골문의 "天"은 정면으로 서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인데, 머리를 일부러 크게 그렸습니다. 어떤 것은 머리가 네모 칸이고, 어떤 것은 거기에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갑골문의 "天"

갑골문의 "天": 정면으로 서 있는 사람, 머리가 유난히 크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허신은 이 글자를 "一"과 "大"로 나누었습니다. 오늘날의 문자학자들은 대개 이 풀이가 맞지 않다고 봅니다. 天은 처음부터 사람 모양이어서 쪼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자가 맨 처음 가리킨 것은, 아마도 사람 머리 위의 바로 그 한 조각이었을 것입니다. 그 한 조각이 쓰이면 쓰일수록 커져서, 마침내 "더없이 높아 위가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글자 모양이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옛사람이 머리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공자보다 오래된 하늘

공자 이전에 주나라 사람들은 "하늘"을 어떻게 말했을까요? 옮겨 적어 둘 만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이 몇 개 있습니다.

《상서(尙書)·무일(無逸)》에서 주공(周公)이 젊은 성왕(成王)을 타이르며 말합니다. 상나라의 중종(中宗)은 "엄숙하고 공손하며 삼가 두려워하고, 천명으로 스스로를 헤아리며, 백성을 다스림에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게으르거나 편안히 지내지 않았다(嚴恭寅畏, 天命自度, 治民祗懼, 不敢荒寧)". 그래서 칠십오 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고 합니다. 뒤의 몇몇 왕은 나면서부터 즐기기만 하고 농사의 어려움을 몰랐는데, 그들은 "역시 오래 살지 못하여, 십 년, 혹은 칠팔 년, 혹은 오륙 년, 혹은 삼사 년이었다(亦罔或克壽, 或十年, 或七八年, 或五六年, 或四三年)". 부지런하고 삼가 두려워한 이는 오래 누렸고, 놀기에 빠진 이는 짧게 누렸습니다.

《시경(詩經)·주송(周頌)》에는 「유천지명(維天之命)」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직 하늘의 명이여, 아아 그윽하여 그치지 않는구나(維天之命, 於穆不已)." 하늘의 운행은 깊고 멀고, 멈추지 않습니다.

천명이 한 집안에 늘 머물지는 않는다고 하는 두 구절도 있습니다. 《상서·강고(康誥)》에는 "명은 일정하지 않다(惟命不于常)", 《시경·대아(大雅)·문왕(文王)》에는 "천명은 일정함이 없다(天命靡常)"고 했습니다.

《좌전·희공 5년》에서는 궁지기(宮之奇)가 우공(虞公)에게 진(晉)나라에 길을 빌려주지 말라고 간하면서 《주서(周書)》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크신 하늘은 가까이하는 이가 없고, 오직 덕 있는 이를 돕는다(皇天無親, 惟德是輔)." 하늘은 누구를 특별히 편애하지 않고, 덕 있는 사람만 돕는다는 말입니다.

베이징 천단의 원구

베이징 천단(天壇)의 원구(圜丘). 명·청 두 왕조의 황제가 동지에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출처: Wikimedia Commons, 钉钉 촬영, CC BY-SA 4.0

이 구절들을 읽으며 저를 가장 움직인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하늘은 아무 때나 화를 내는 신이 아니었고, 물리적인 하늘만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은 "보는" 존재였습니다. 부지런한지, 삼가고 두려워하는지, 덕이 있는지를 보고, 다 보고 나서 천명을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공자 이전부터 있던 것입니다. ("天道"라는 말은 오히려 나중의 위고문에 가서야 많아집니다. 이 이야기는 TenTao의 "소개" 페이지에서 했으니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같은 글자, 다섯 가지 뜻

철학자 풍우란(馮友蘭)은 《중국철학사》에서 유명한 정리를 했습니다. 중국어의 "天"에는 다섯 가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풍우란

풍우란(1895–1990). 출처: Wikimedia Commons,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첫째, 물질의 하늘. 땅과 짝을 이루는 그 하늘입니다. "하늘은 덮고 땅은 싣는다(天覆地載)"고 할 때의 하늘입니다.

둘째, 주재(主宰)의 하늘. 의지가 있어 상도 주고 벌도 주는 하늘, 곧 "황천상제(皇天上帝)"입니다. 공자의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가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에 죄를 지으면 다른 곳에 가서 빌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 운명의 하늘. 사람의 힘이 닿지 않는 몫의 명입니다. 풍우란이 든 예는 맹자의 "공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若夫成功則天也)"입니다. "쉰에 천명을 안다(五十而知天命)"는 흔히 이 뜻으로 읽힙니다.

넷째, 자연의 하늘. 법칙대로 운행하는 하늘입니다. 순자(荀子)는 이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였습니다.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함이 있어, 요 임금이 있다 하여 존재하지 않고, 걸 임금이 있다 하여 없어지지 않는다(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논어》의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계절이 돌아가고 만물이 자라는데(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도 흔히 이 뜻으로 읽힙니다.

다섯째, 의리(義理)의 하늘. 우주에서 가장 높은 도리입니다. 《중용》은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했고, 북송에 이르러 정호(程顥)는 이렇게 자부했습니다. "내 학문은 전수받은 바가 있지만, 천리(天理) 두 글자는 내가 스스로 체득해 낸 것이다(吾學雖有所受, 天理二字却是自家體貼出來)."

이 다섯 가지는 풍우란이 정리한 것이지 옛사람들이 스스로 내놓은 목록이 아닙니다. 그는 공자가 말한 하늘은 모두 둘째 것이라고도 보았는데, 이 점은 《논어》를 읽는 후세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섯 가지를 한자리에 놓으면 조금 터무니없습니다. 둘째는 화를 내고, 넷째는 당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고, 다섯째는 하나의 도리입니다. 같은 글자가 거의 다섯 가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이 다섯 가지는 같은 사람의 입에서, 같은 책 안에서 함께 나오는 일이 많습니다.

하늘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것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보겠습니다.

국가 차원의 제사는 있었습니다. 명·청 시대에 황제는 동지에 천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이 일은 천자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름은 없습니다. 유대인의 신에게는 이름이 있고, 기독교의 신에게도 이름이 있지만, "하늘"에게는 없습니다. 그냥 "하늘"입니다.

경전도 없습니다. 《논어》《맹자》에는 하늘에 관한 말이 많지만, "하늘에 관한 설(說)"이라고 부를 책은 한 권도 없습니다.

교회도 없습니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나라의 일이었고, 보통 사람들이 한 것은 조상 제사였고, "하늘이 도우셨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제 구상에서 가장 큰 난관입니다. 제 상징은 전서의 "天"입니다. 사람의 머리 위에 가로획 하나. 하지만 이것을 둘러싸고 종교를 세우려면 먼저 한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섯 가지 중 어느 쪽인가.

이것을 사람으로 만들려던 이들

이 문제를 유럽 사람들은 몇백 년 전에 이미 만났습니다.

명나라 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자기들의 신에게 중국어 이름을 붙여야 했습니다. "천(天)"으로 할까, "상제(上帝)"로 할까, 아니면 새로 "천주(天主)"라는 말을 만들까? 그들은 몇십 년을 자기들끼리 다투었고,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전례 논쟁(典禮論爭)"입니다.

1704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명을 내렸습니다. 기독교의 신을 "천"이나 "상제"로 부르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며, "천주"라고는 부를 수 있다. 1715년에 이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판결이 뜻하는 바는 사실 분명합니다. 유럽 사람들이 보기에 "천"이라는 글자는 그들이 원하는 신을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너무 넓고, 너무 모호하고,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두 세기가 더 지나서야 바티칸은 1939년에 이 논쟁을 다시 평가했습니다.

이 일에서 제가 마음에 두는 점은 이것입니다. 하나의 토착 개념을 외래 종교가 "넘겨받아" 보려 했고, 넘겨받기에 실패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뒤집어 보면

"하늘"의 이런 모호함은 어쩌면 결점이 아닙니다.

하나의 개념이 다섯 부류의 사람에게 동시에 쓰일 수 있습니다. 글 읽는 사람은 도리를 말하는 데 쓰고, 황제는 정당성을 말하는 데 쓰고, 농민은 욕을 하고 기도를 하는 데 씁니다. 하나의 정의 안에 못 박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살아남았고, 어느 한 신학에도 붙잡히지 않았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사실 이 다섯 가지를 가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일상에서 "하늘님" "하늘만 알지" "천리에 어긋난다"고 할 때, 주재도 운명도 도리도 한 숨에 다 말해 버리는데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섯 가지 뜻"은 어쩌면 학자들이 정리해 낸 것이지, 사람들 마음에 정말 서랍이 다섯 개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종교가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 종교가 마주하는 것은 마음에 서랍이 없는 보통 사람인가, 서랍이 있는 글 읽는 사람인가?

제가 바라는 하늘

제가 바라는 하늘은 둘째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고, 상벌을 내리고, 누군가가 대신 말해 줄 수 있는 하늘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말하지 않지만 법도가 있는 하늘입니다. 요 임금이 있다 하여 존재하지 않고, 걸 임금이 있다 하여 없어지지 않는 하늘. 그 법도는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채우는 것(損有餘而益不足)"입니다. 이런 하늘은 사람이 아니고, 공물을 받지 않고, 간청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두고 "공경하되 구하지 않는다(敬而不求)"고 말합니다.

풍우란의 다섯 가지로 말하면 넷째와 다섯째 사이에 놓입니다. 자연의 운행과 우주의 최고 도리가 합쳐진 것, 곧 "천도(天道)"입니다.

일상에서 이 다섯 가지가 갈리지 않는 것은 저는 쪼개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거기에 방향 하나를 주고 싶을 뿐입니다. "천도" 쪽으로 모이게 하는 것.

전서의 "天"

전서의 "天": 팔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 머리 위에 가로획 하나.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제가 왜 하필 이 "말하지 않는" 하늘을 원하고, 이름이 있어서 말하는 신을 원하지 않는지도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유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두려워서입니다. 말하는 신이 있으면 그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대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것은 하늘이 내게 알려 준 것이다"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이 홍수전(洪秀全)이고 양수청(楊秀淸)이며, 하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 모든 이들입니다. 하늘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면 이 길이 막힙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야말로 중국 사람들의 본래 하늘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사람이 말한 "크신 하늘은 가까이하는 이가 없고, 오직 덕 있는 이를 돕는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편들지 않고 매수되지 않고, 오직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만 봅니다. 이런 하늘이어야 "공경"에 걸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몹시 어려운 선택이라는 것도 압니다. 말하지 않는 하늘을 어떻게 사람이 매일 떠올리게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에는 성경이 있고 예배가 있습니다. 이슬람은 하루에 다섯 번 예배하고, 유대교는 매주 안식일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이름도, 경전도, 교회도 없습니다. 지금 제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늘을 날들 속에 놓는 것입니다. 청명에 조상께 제사 지내고, 동지에 온 가족이 마당에 서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밥을 먹기 전에 "요 임금이 있다 하여 존재하지 않고, 걸 임금이 있다 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를 한번 떠올려 보는 것. 이런 하늘은 누가 대신 강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하루의 어느 한순간에 고개를 들어 보는 것입니다. 아직 끝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작점일 뿐입니다.

고개를 들어 본 적이 있는 모든 분께 씁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어떤 여권을 들었든, 어떤 문자를 쓰든, 어렸을 때 "하늘이시여" 혹은 "하늘님" 같은 말을 한 번쯤은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머리 위에 무언가가 있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옛사람은 그것을 팔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 그 머리 위의 가로획 하나로 썼습니다. 이 글자는 서울에서 하노이까지, 도쿄에서 싱가포르까지 우리가 같은 것을 쓰고 있습니다. 밤에 혼자 고개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으로는 누군가 들었다고 느끼던 순간, 그런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천도(天道)는 그 글자 머리 위의 가로획 하나입니다. 무릎 꿇을 필요 없이, 고개를 한 번 들면 충분합니다.


"하늘만 알지"라고 말할 때, 여러분이 말하는 하늘은 어느 쪽 하늘입니까?


참고 자료

  • 함께 읽기: 〈한국에는 정말로 "천도교"가 있었다〉(같은 시리즈: "인내천")
  • 허신 《설문해자》 "天" 자 항목; 갑골문·금문의 "天" 자형
  • 풍우란 《중국철학사》: "天"의 다섯 가지 뜻(《중국철학사신편》 제1책에도 있음)
  • 《논어》: 〈팔일(八佾)〉 "獲罪於天, 無所禱也", 〈위정(爲政)〉 "五十而知天命", 〈양화(陽貨)〉 "天何言哉"; 《맹자》 "若夫成功則天也"; 《중용》 "天命之謂性"
  • 《순자·천론(天論)》
  • 정호의 "天理二字", 《이정집(二程集)》에 보임
  • 《상서·주서·무일》〈강고〉; 《시경·주송·유천지명》〈대아·문왕〉; 《춘추좌씨전·희공 5년》이 인용한 《주서》(위키문헌으로 글자 단위 대조, 원서 쪽수는 대조하지 않음)
  • 중국 전례 논쟁: 1704년 11월 20일 교령 《Cum Deus optimus》, 1715년 《Ex illa die》, 1939년 《Plane compertum est》
  • 천단과 명·청 천자의 동지 제천: 통설
  • 그림 출처는 각 그림 설명에 적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