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胡)'라는 글자를 말하지 못하게 한 황제

319년, 갈(羯)족의 석륵(石勒)은 양국(襄國)에서 조왕(趙王)을 칭했습니다. 그해 그는 호인(胡人)을 앞으로 '국인(國人)'이라 부르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뒤에 궁전이 완성되고 법령이 엄해지면서 그 가운데 "호 자를 휘(諱)하기가 더욱 엄하다"는 조항이 생겼습니다. 다른 글자는 봐줄 수 있어도 '호' 자만은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진서(晉書)』에 작은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번탄(樊坦)이라는 참군은 집이 가난했고, 석륵은 그를 내사(內史)로 발탁하려 했습니다. 번탄이 작별 인사를 하러 오자, 석륵은 그의 해진 의관을 보고 놀랐습니다. "번 참군, 어찌 그리 가난해졌소?" 번탄은 정직한 사람이라 입에서 말이 불쑥 나왔습니다. "얼마 전 갈적(羯賊)을 만났는데, 인정머리 없는 놈들이 집안 재산을 몽땅 털어 갔습니다."

갈족 황제 앞에서 갈적을 욕한 것입니다. 그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데 석륵은 웃었습니다. "갈적이 그리 심하게 털어 갔다니, 그럼 내가 보상하겠소." 번탄은 겁에 질려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반평생 가난하게 산 늙은 서생이 사실대로 한마디 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까요. 석륵은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 금령은 속인들을 막으려는 것이지 그대 같은 늙은 서생과는 상관없다고 하며 수레와 말, 옷, 거기에 삼백만 전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조왕을 칭한 그해, 석륵은 호인을 다스리는 관리들에게 또 한 가지 규칙을 정했습니다. "의관화족(衣冠華族)을 모멸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모역(侮易)'은 괴롭히고 얕본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저는 멈춰 섰습니다. 호인 황제가, 자기 지배하의 한인 사족에게 붙인 이름이 '의관화족'이었습니다. 그의 눈에 화(華)와 이(夷)는 어떻게 갈렸을까요? 의관으로 갈렸습니다.

명대 그림 속 석륵

명대 화가가 그린 석륵(『석륵예불도』의 일부). 후세의 상상도이지 당시의 초상이 아니며, 한식 포복을 입고 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전선(錢選) 전칭, 프리어 미술관 소장, CC0

고염무는 왜 뒤를 돌아보았나

이 시리즈는 1644년부터 이야기하겠다고 했는데 첫 편은 4세기로 달려갔으니,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가 거슬러 간 것이 아닙니다. 고염무가 먼저 거슬러 갔습니다. 그는 명이 망하는 것을 제 눈으로 보고 『일지록(日知錄)』을 썼는데, 그 안에 「정시(正始)」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정시는 조위(曹魏)의 연호로 240년부터 249년까지이며, '청담(淸談)'은 그때 일어났습니다. 고염무는 그 시절의 명사들이 "경전을 버리고 노장을 숭상했으며, 예법을 업신여기고 방달(放達)을 높였다"고 하고, 뒤에 "강융(羌戎)이 서로 참칭하고 군신이 자주 바뀌었다", "죽림 속 여러 현인의 허물이 아니고 누구의 허물이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죽림의 사람들 탓이 아니라면 누구를 탓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 유명한 "나라가 망하는 일이 있고, 천하가 망하는 일이 있다"도 바로 이 조항에 쓰여 있습니다. 명이 망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 원인을 찾아 천사백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니 명의 멸망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가 본 그 멸망을 한 번 보아야 합니다.

명교를 넘어서

먼저 혜강(嵇康)입니다. 그는 「석사론(釋私論)」에 유명한 구절을 썼습니다. "명교를 넘어 자연에 맡긴다." 명교(名敎, 군신·부자 같은 역할과 의무의 그물) 따위는 지키지 않고 내 마음대로 가겠다는 뜻입니다.

멋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당시의 명교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난징에서 출토된 죽림칠현 벽돌 그림

난징에서 출토된 '죽림칠현과 영계기' 틀찍기 벽돌 그림(동진 또는 남조). 혜강은 그림 속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rof. Gary Lee Todd 촬영, CC BY-SA 4.0

262년 무렵 혜강은 사마소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참소한 이는 종회(鍾會)였는데, 혜강과 여안이 "언론이 방탕하고 전모(典謨)를 헐뜯는다"고 하며 "이 틈에 제거하여 풍속을 순후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권했습니다. 풍속을 순후하게 하려고 죽이는 것입니다. 형을 받는 날, 삼천 명의 태학생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혜강은 해 그림자를 보고 거문고를 청해 한 곡, 「광릉산(廣陵散)」을 타고는 이 곡이 오늘부터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때 겨우 마흔 안팎이었습니다.

루쉰은 1927년 광저우에서 이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위진 때 입으로 예교를 받든 사람이 실제로는 예교를 무너뜨리고 있었고, 겉으로 예교를 무너뜨리는 듯한 사람은 "실은 오히려 예교를 인정하고 예교를 너무 믿었다"고요. 조조가 공융을 죽이고 사마씨가 혜강을 죽일 때 죄명은 모두 '불효'와 닿아 있었지만, "그러나 사실 조조나 사마의가 언제 유명한 효자였던가". (루쉰은 여기서 사마의라고 썼지만 손을 쓴 사람은 그의 아들 사마소입니다.)

솔직히 말해 명교는 그때 이미 한 자루의 칼이었습니다. 혜강이 '넘어선' 것은 그런 명교였습니다.

명교도 청담도,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오십 년쯤 더 앞으로 가 봅니다.

299년 강통(江統)은 「사융론(徙戎論)」을 써서, 안으로 이주해 들어온 저(氐)와 강(羌)을 원래 땅으로 돌려보내라고 조정에 권했습니다. 『진서』의 사신(史臣)은 뒤에 이를 "나라를 경영하는 원대한 계책"이라 평했으나 아깝게도 쓰이지 못했습니다.

304년, 혜강의 아들 혜소(嵇紹)는 탕음 전투에서 진 혜제의 앞을 막아서다 빗발치는 화살에 맞아 죽었고, 피가 황제의 옷에 튀었습니다. 뒤에 시종들이 빨려 하자 혜제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혜 시중의 피다. 빨지 마라." 혜소의 아버지는 사마씨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원수와 황제의 은혜 사이에 끼어, 그는 마지막에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311년 낙양이 함락되었습니다. 청담의 영수 왕연(王衍)은 석륵에게 사로잡혀 자신은 어려서부터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고 하더니, 이어 석륵에게 황제를 칭하라고 권했습니다. 석륵마저 듣다 못해 "천하를 망친 것이 바로 그대의 죄다"라고 했습니다. 왕연은 죽기 전에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때 허황된 것을 숭상하지 않고 함께 힘써 천하를 떠받쳤더라면 오늘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313년 정월, 평양(平陽)에서 흉노의 유총(劉聰)은 신하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벌이고, 사로잡힌 진 회제에게 푸른 옷을 입혀 술을 따르게 했습니다. 황제가 지난날의 신하들에게 한 잔 한 잔 술을 따르고, 얼마 안 되어 살해되었습니다.

명교는 사마씨의 손에 든 칼이었고, 청담은 왕연들의 간판이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자 둘 다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지켜진 것은 무엇인가

진 왕실은 남쪽으로 건너갔습니다. 강을 건넌 선비들은 날씨가 좋으면 서로 불러 건강(建康) 성 밖 신정(新亭)으로 술을 마시러 갔습니다. 한번은 주의(周顗)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풍경은 다르지 않은데, 산하는 확실히 다르구나." 경치는 낙양과 비슷한데 산하는 더 이상 그 산하가 아닙니다.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직 왕도(王導)만 안색이 변했습니다. "마땅히 함께 힘을 모아 왕실을 위하고 신주(神州)를 되찾아야 하거늘, 어찌 초나라 죄수처럼 마주 앉아 울고만 있는가?"

거의 같은 무렵, 조적(祖逖)은 백여 호의 유민을 이끌고 강을 건너 북으로 가다가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자 노를 두드리며 맹세했습니다. "조적이 중원을 맑게 하고 다시 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이 큰 강과 같으리라."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오호(五胡)가 화(華)를 어지럽힌 일이백 년 동안 남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지킨 것은 명교가 아닙니다. 명교는 혜강의 세대에 이미 쓰다 닳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킨 것은 화이(華夷)의 구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이의 구분은 의관과 문화상의 구별을 가리키며, 혈통으로 따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석륵의 '의관화족'이라는 한마디가 그대로 주석이 됩니다. 호인 황제 자신조차 의관으로 사람을 알아보았습니다. 후세에 이 남천(南遷)을 '의관남도(衣冠南渡)'라 부르는 것도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의관이란 글자 그대로 '옷과 갓', 화하임을 보여 주는 눈에 보이는 표지입니다).

작은 디테일이 있습니다. 왕도가 말한 '초수(楚囚)'는 『좌전』에 전거가 있습니다. 초나라의 종의(鍾儀)가 사로잡혀 진나라에 보내졌는데 머리에 줄곧 초나라의 '남관(南冠)'을 쓰고 있었고, 진의 대부가 그를 "옛것을 잊지 않는다"고 칭찬했습니다. 왕도는 초수를 들어 사람들에게 울지 말라고 했지만, 그 고사 자체가 말하는 것은 포로가 되고서도 제 갓을 쓰고 있던 사람입니다.

북쪽 이야기도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백팔십 년 뒤 북위 효문제는 "의복의 제도를 고친다"는 조서를 내렸고, 이듬해에는 조정에서 선비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어기면 면직했습니다. 선비족 황제가 고친 것은 자기 사람들의 의관이었습니다.

룽먼 석굴 빈양중동 「제후예불도」의 효문제와 시종

룽먼 석굴 빈양중동 부조 「제후예불도」의 일부, 효문제 일행입니다. 군신이 모두 넓은 소매의 포복에 높은 관을 써서 이미 한식 조복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작자 미상, CC0

천삼백 년 뒤

이 선은 그대로 천삼백 년을 이어졌습니다.

1644년 5월, 청군이 베이징에 들어오고 도르곤은 투항한 관리와 군민에게 "모두 머리를 깎고, 의관은 모두 본조의 제도를 따르라"고 명했습니다. 이듬해 6월에도 다시 내렸습니다. "모두 머리를 깎아라.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린다."

이번에는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효문제가 고친 것은 자기 사람들의 의관이었고, 이 영이 고친 것은 남의 의관입니다. 석륵은 '의관화족'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 영이 원한 것은 천하에 더 이상 '의관화족'이 없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이 내려온 뒤 의관은 정말로 목이 달아나는 일이 되었고, 그것으로 맞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명의 관리 장춘(張春)은 싸움에 패해 사로잡혀 선양의 삼관묘에 갇혔습니다. 조선의 『이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줄곧 "한복을 입고" "머리를 깎지 않았으며", 매월 초하루에는 "의관을 갖추고 조배(朝拜)의 예를 이루었고", 앉을 때는 반드시 서쪽, 베이징 쪽을 향했습니다. (장위싱 「선양 삼관묘와 청초 사실」에서 재인용.) 낯선 땅의 사당에 갇힌 한 사람이 한 달에 한 번, 보이지 않는 경성을 향해 의관을 정제하고 절을 올렸습니다. 뒤에 그는 거기서 죽었고, 홍타이지는 "몹시 아까워하며" 예로써 장사 지내게 하고 석탑까지 세워 주었습니다.

고염무는 이 두 영이 내려오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정시」 조에서 천하가 망하는 것을 명교의 붕괴로 돌리고, 위진의 청담이 천하를 "아버지도 임금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혜소도 특별히 꾸짖어, 아버지가 사마소에게 죽었는데 사마씨를 섬긴 것은 "그 아버지를 잊고 임금 아닌 임금을 섬긴 것"이니 탕음에서의 죽음으로도 죄를 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거의 백 년 뒤 사고관신(四庫館臣)들이 이 조항을 어떻게 고쳤는지 보겠습니다. 혜소를 '무부(無父)'라 꾸짖은 부분, 곧 명교를 논한 절반은 손대지 않고 남겼습니다. "강융이 서로 참칭하고"는 "전쟁이 날마다 다툰다"로 고쳐졌고, "정시 이래로"부터 "필부의 천한 자도 책임이 있다"까지는 통째로 삭제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서진의 선비들을 "줄줄이 유총과 석륵의 신하가 되어, 옛 주군이 푸른 옷으로 술을 따르는 것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비꼬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명교를 논한 말은 청 조정이 마음 쓰지 않았고, 화이를 논한 몇 구절은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고염무 자신이 말한 것은 명교였지만, 책을 깎은 사람들은 이 대목의 어느 구절이 찌르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짐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1729년 옹정제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에서 스스로 말했습니다. "무릇 화이의 설은 진·송·육조가 한쪽에 치우쳐 안주하던 때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비루하고 좁은 견해"라고 했습니다. 같은 글에서 자기 왕조를 "우리 외이(外夷)"라고도 불렀습니다. 만주와 화하의 차이를 청 황제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다만 남이 말하지 못하게 했을 뿐입니다. 예전에 석륵이 '호' 자를 말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옹정제 조복상

옹정제 조복상. 출처: Wikimedia Commons, 청 궁정 화가, 퍼블릭 도메인

책을 깎은 전말은 고염무를 다루는 편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 편은 1644년의 베이징으로 돌아갑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체발령을 오늘날 많은 사람은 "풍속이 바뀐 일" 정도로 가볍게 넘깁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석륵은 '의관화족'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했고, 효문제가 고친 것은 자기 사람들의 의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호인이었지만 "천하를 모두 우리 모습으로 만들겠다"고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1645년의 그 영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머리를 깎지 않으면 군법에 따른다고. 머리에 남은 머리카락이 생과 사의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삼백 년 동안 한 문명의 가장 눈에 보이는 껍데기가 이렇게 강제로 바뀌었습니다. 서문에서 의관과 복식이 본래 화하의 의귀이며 1644년 이후 그것이 파괴되었다고 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것을 "만주인이 나쁘다"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하나의 정령, 하나의 정권이 한 일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합니다. '만주'는 옹정제 스스로 쓴 이름이고 그는 "우리 외이"라고 했으니 저도 그렇게 쓰겠습니다. 체발령은 청 조정이라는 정권의 행위이니 정권의 행위로 쓰고, 어느 민족의 '성격'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혈통은 원인이 아닙니다.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혈통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보기

첫째, 고염무 본인은 제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가 '천하가 망함'을 재는 잣대는 "인의가 막히는 것", "아버지도 임금도 없음"으로, 분명히 명교에 놓여 있습니다. 이 글에서 가장 많이 쓴 자료의 결론이 제 결론과 반대입니다. 제 독해는 이렇습니다. 그는 명교를 말했고, 책을 깎은 사람들은 화이를 읽어 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독해입니다.

둘째, 육조의 사족은 사실 명교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황여성(黃汝成)의 『일지록집석』은 「정시」 조 아래에 양 편수(楊編修)의 말을 붙였는데, 육조의 풍기가 경박하기는 했으나 후세가 따르지 못한 점이 다섯 가지 있다고 합니다. 가휘(家諱)를 중히 여기고, 문벌을 중히 여기고, 혼인을 삼가고, 유품(流品)을 가리고, 청의(淸議)를 주로 삼은 것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남도한 선비들이 지킨 것은 바로 가례(家禮)와 명교이고 화이의 구분은 그 한 면에 불과합니다.

셋째,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화이의 구분이 혈통이 아니라 의관과 문화만 본다면, 호인이 화하의 의관을 배우면 화가 되는가. 304년 유연(劉淵)은 거병하여 국호를 아예 '한(漢)'이라 하고 유선(劉禪)을 추존하며 말했습니다. "제왕에게 어찌 정해진 혈통이 있겠는가. 대우(大禹)는 서융에서 났고 문왕은 동이에서 났으니, 오직 덕이 주어지는 곳에 달렸을 뿐이다." 천사백 년 남짓 뒤 옹정제는 "본조가 만주인 것은 중국에 본관(籍貫)이 있는 것과 같다. 순은 동이 사람이고 문왕은 서이 사람이다"라고 했으니, 거의 같은 논법입니다. 문화로 화이를 가르면 문이 열려 있고,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그 이치를 들어 자기를 위해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한 제 답은 이렇습니다. 방향을 봐야 합니다. 효문제는 호인이 스스로 화하의 의관을 향해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선비 복식을 한식 조복으로 바꾸고 조정에서 선비어를 쓰는 것까지 단속했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도 엄했지만 방향은 안으로, 문으로 들어오는 쪽이었습니다. 1645년의 그 영은 정반대였습니다. 이미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밖으로 나가 남의 모습으로 바꾸라고 요구했습니다. 둘 다 "의관이 바뀌었다"로 보이지만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이 기준은 성립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환영하고, 들어왔으면 한 식구이며 조상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는다. 반대로 문 안의 사람에게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더 이상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입니다. 옹정제의 "순은 동이 사람"이라는 말은 멋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청은 한편으로 "들어오면 중국인이다"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머리를 깎지 않으면 죽인다는 옛 규칙대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 둘을 나란히 놓으면 그 말이 도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당시 사람들 스스로도 이렇게 깔끔하게 가르지는 않았습니다. 강통의 「사융론」은 융적이 "말이 통하지 않고, 예물이 같지 않고, 법과 풍속이 다르고, 종류가 어긋난다"고 하여 언어·예속·종류를 한데 섞어 말합니다. "화이의 구분은 의관과 문화만 본다"는 것은 하나의 독해이고, 옛사람이 모두 그렇게 쓴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잣대에는 아직 다 말하지 못한 한쪽 끝이 있습니다. 이웃들입니다. 1644년 이후 조선은 청을 중화로 인정하지 않고 '소중화'를 자처했는데, 쓴 것이 바로 의관과 예였습니다. 우리는 아직 명의 옷을 입고, 명의 예를 행한다고. 이 한쪽은 《이웃들의 하늘》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여기에 두는 것은 한 가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의관이라는 잣대는 저 혼자 꺼낸 것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화하 주변에서 중국 책을 가장 진지하게 읽은 사람들이 써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편과 《탈사》의 관계를 한마디. 《탈사》에서는 "신은 바뀌었지만 말은 바뀌지 않았다"거나 "정복당하고도 도리어 정복자를 고쳐 썼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가로로 본 것입니다. 석륵, 효문제, 고염무는 같은 종류의 일을 세로로 보는 것입니다. 한 문명이 마지막에 무엇을 남기는가는, 무엇이 날마다 사람들에게 살아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명교와 의관 중 하나만 지킬 수 있다면, 남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지킨 것은 어느 쪽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고 자료

  • 혜강 「석사론」, 『혜중산집』
  • 『진서』: 권5 「효회제기」, 권43 「왕연전」, 권49 「혜강전」, 권56 「강통전」(「사융론」 부), 권62 「조적전」, 권65 「왕도전」, 권89 「충의전·혜소」, 권101 「유원해재기」, 권105 「석륵재기하」
  • 유의경 『세설신어·언어』, 유효표 주
  • 『위서』 권7하 「고조기하」
  • 고염무 『일지록』 「정시」 조 (황여성 집석본 권17; 사고전서본 권13)
  • 『세조장황제실록』 권5, 권17 (장창 「청대 체발정책 재론 ― 위훙량 선생과의 논의를 겸하여」, 『칭화대학 학보(철학사회과학판)』 2021년 제3기에서 재인용)
  • 옹정 『대의각미록』 권1, 1729년
  • 루쉰 「위진 풍도 및 문장과 약 및 술의 관계」, 1927년, 『이이집』 수록
  • 장위싱 「선양 삼관묘와 청초 사실」 (장춘 대목은 재인용; 원문은 우한 편 『조선 이조실록 중의 중국 사료』 제9책)
  • 왕위안충, 펑파이 신문 기사(조선은 1704년부터 한성에 대보단을 두어 명을 제사하고 1897년까지 이어 감; '소중화' 의식); 거자오광의 연행 문헌 속 '대명 의관' 연구 (🟡, 모두 소개를 통한 것)
  • 그림 출처는 각 그림 설명에 적었음